° 아날로그 스토리 _ 환상에 가둔, 환상에 갇힌 _ 김신영 편집장

욕망은 내면의 시간과 공간을 잠식한다. 헛된 욕망에서 배태된 환상은 현실을 가리고 인간은 미망에 빠진다. 연극 <엠. 버터플라이 M. Butterfly>는 전복과 해체의 서사를 통해 욕망이 낳은 환상에 미혹된 인간의 민낯을 폭로한다. 중국계 미국인 극작가 데이비드 헨리 황(David Henry Hwang, 1957~)이 집필한 이 희곡은 1993년 워싱턴 D.C. 국립극장에서 최초로 무대화되었고, 이후 뉴욕 브로드웨이 유진 오닐 극장에서 777회 연속 상연되었다. 대중성을 입증한 이 작품은 토니 어워즈 최고 작품상(1988), 드라마 데스크 어워즈 최고 신작상(1988)을 받았고, 퓰리처상 드라마 부문 최종 후보(1989)에 오르는 등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국내에서는 사연(2012~ 2017)을 거쳤고, 이번 시즌은 브로드웨이 개작 버전(2017)의 첫 상연이다.

<엠. 버터플라이>의 주된 시대적 배경은 1964년부터 1986년으로, 중국의 문화대혁명, 베트남 전쟁, 6.8혁명(5월 혁명) 등 굵직한 역사가 인물의 삶을 관통한다. 이 작품은 중국의 경극 배우이자 스파이였던 여장남자 쉬 페이푸(時佩璞, 1938~2009)<극 중 ‘송 릴링’>가 프랑스 외교관 버나드 브루시코(Bernard Boursicot, 1944~)<극 중 ‘르네 갈리마르’>를 속여 밀접한 관계를 맺고 국가기밀문서를 유출시킨 실화를 모티브로 한다. 여기에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을 차용 및 변용해 문학적으로 형상화했다. 오페라의 여주인공인 15세의 게이샤 초초상(나비부인)은 美 해군 장교 핑커튼에게 헌신적인 사랑과 순정을 바치지만 결국 배반당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비장미 넘치는 <나비부인>에는 아름다운 음악과는 대조적으로 성차별적인 시선과 제국주의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오리엔탈리즘이 짙게 깔려 있다. 이 고착화된 관념은, ‘유럽사회(우리) 경계선 밖의 동양(상대방)이 “교정되고 처벌되어야” 하기에 “동양은 동양화된다”’¹는 서구 중심의 이데올로기다. 또한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이 서양보다도 약했기 때문에 동양을 억누른,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교의이고 그것은 동양이 갖는 이질성을 그 약함에 관련시켜 무시하고자 하는 것”(a, p.353~354)이다. 이러한 이항 대립의 사고에 함몰된 타자화 전략은 개별 존재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면서 상대방과의 구별 짓기를 극단화한다.

<엠. 버터플라이>는 <나비부인>에 드러난 지배와 종속 구조를 반전시키며 위계화를 허물어뜨린다. 물론 작가는 작품의 주제의식인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이 자칫 옥시덴탈리즘(Occidentalism), 즉 반서구주의로 기울어지는 것에 대한 위험성도 경계한다. 대립적 사고가 아닌 대칭적 사고로, 공멸이 아닌 공존을 지향하며. 이처럼 가변성·상대성을 향한 작가의 ‘다시 쓰기’는 관객에게 ‘다시 읽기’라는 연극적 유희를 제공한다. 사실과 허구가 중첩된 이 작품은 두 인물의 사랑과 욕망이라는 표면 서사와 심층 서사로 구성된다. 이 다층적 층위에는 서양·동양, 남성·여성, 진실·거짓, 구시대·현시대, 제국주의·탈식민주의, 지배·피지배, 중심·주변 등의 담론이 내재해 있다.

이 작품에서는 기법(해설자, 극중극, 재판 장면, 노래, 관객에게 말 걸기 등)과 실천적 사유에 있어서 브레히트의 서사극적 특징이 발견된다. 이는 낯설게 하기, 즉 소격효과(Verfremdungseffekt)를 위한 것으로 관객은 무대 위의 사건과 현상, 사회적 모순에 심미적 거리를 두고 비판적 태도를 취한다. 적극적인 참여자로서 극이라는 가상(환상)과 현실(실재)을 구분하며 작품의 문제의식을 극장 밖, 삶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이로써 관객과 무대 사이의 ‘제4의 벽’은 제거되고 극적 환상은 깨진다.

극 중 해설자인 르네는 현재 시점에서 과거를 서술하는데, 이 방식은 이미 구성된 역사와 삶이 ‘어떻게 재구성되는가’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극 후반부의 대화에서 그는 밝혀진 진실 앞에서도 현실 부정을 하며 계속해서 환상을 좇는다. 상상이 빚어낸 실재, 그 허구적 실체를. “나한테서 떨어져! 오늘 밤, 나는 마침내 환상과 현실을 구별하는 법을 배웠어. 그리고 나는 그 차이를 알면서도 환상을 선택할 거야(갈리마르)”, “나는 당신의 환상이에요!(송)”² 하지만 끝내 환상이 되어버린 자신의 삶을 통탄하며 좌절된 욕망 앞에 좌초된 르네는 나비부인 분장을 한 채 옥중에서 자결한다. 환상 속에서 날갯짓하는 순종적이고 이상화된 여인 ‘송 릴링’을 자신의 나비 ‘Madame Butterfly’로 믿었던 그는 스스로 나비부인이 된 것이다. 결국 제목의 ‘M’은 ‘Madame’ 아니면 ‘Monsieur’, 혹은 또 다른 무엇으로 치환되어 텍스트의 다층성과 모호성을 절묘하게 결합한다.

문학의 꽃은 시대와 삶 안에서 새롭게 움튼다. 시대와 시절을 통과한 이야기는 사회적 맥락과 변화에 따라 개작이 요구되기도 한다. 작가는 2017년 개작 버전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변화된 지점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더 많은 입체성을 만들고, 더 많은 뉘앙스를 만들며, 러브스토리를 풍부하게 하면서 송과 갈리마르의 관점을 조금이라도 균형 잡히게 하려고 세부 사항을 많이 조정했어요. 한 가지 구체적인 예로, 실제 스파이였던 쉬 페이푸는 라는 중국 오페라에서 연기했어요. <나비 연인>은 오늘날 매우 인기 있는 중국 이야기예요. 젠더 혼란에 관한 내용이기도 하죠. 그래서 우리는 이 버전의 이야기에 <나비 연인>에 대한 인식을 통합시켰어요. <나비 연인>은 분명 동등한 관계에서의 사랑을 강조하는 극적 장치로 쓰였으며, 작가는 자신의 말대로 송의 관점과 그 관계에서의 경험을 좀 더 강하게 이끌어내고 관객의 인식 변화를 가능케 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개작판에 윤색을 거친 이번 한국 무대에서는 주제의 무게중심이 흔들리다 보니 주제 의식과 텍스트의 응집력이 약해졌다. 물론 그 자체로도 재미와 의미가 있지만, 다시 ‘평면에서 입체로’ 텍스트의 밀도 있는 통합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