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발자국 _ 당신만의 스포트라이트를 위해 _ 선은지

첫발자국

당신만의 스포트라이트를 위해

선은지, 모델·작가

“스탠바이, 3, 2, 1, go!” SBS 슈퍼모델 생방송 본선 무대가 시작되었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내가 예선에서 2,500명 중 1·2차 오디션을 거쳐 본선 30인 안에 든 것도 놀랍지만, 그중 최종 2위와 3관왕이라는 타이틀까지 거머쥐게 된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나는 화려하게 모델계에 데뷔했다. 이십 대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스포트라이트를 온몸으로 받으며 빛나는 사람으로 당당하게 세상 밖으로 워킹을 한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무대가 아니었다. 다음 해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2위 정도면 당연히 광고도 들어오고 소속사들의 러브콜이 쏟아질 줄 알았다. 그러나 순진한 상상이었다. 꼭 슈퍼모델 대회가 아니더라도 모델·연예계로 진출하는 통로는 이미 여러 채널이 있어서일 것이다. 위기감이 몰려왔다. 사실 잘 다니던 건축 회사에 사표까지 내고 도전했던 터라 어렵사리 높은 문턱까지 넘은 내게 마땅히 있어야 할 비단길은 없었다.

하지만 여기서 도전을 멈출 수는 없었다. 조경설계 일을 하면서도 대형면허에 굴삭기를 모는 것은 물론이고 세계 미인대회에 나간다고 월차·연차까지 몰아 쓴, 적극성과 도전의식만큼은 자신 있었기 때문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안 힘들어야만 하지?’ 우리의 인생 앞에 비단길이 무궁무진 펼쳐질 거라는 기대와 간극이 큰 현실을 마주한다 해도, 그렇다고 이 힘든 삶이 내 것이 아니라고 부정할 순 없지 않을까? 잘 생각해 보면 힘들었을 때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을 때가 더 많았다. 그래서 그 힘든 시간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부정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 모든 과정은 내 선택으로부터 출발한 것이니 결과에 대해서도 겸허히 수용하는 자세가 먼저였다.

모든 순간이 첫발자국이라는 생각으로 A4용지를 펼쳐 들었다. 하나씩 ‘나’를 적어보았다. 그리고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당시 나를 체크해 본 결과는 크게 세 가지였다. 나이가 너무 많은 것과 소속사가 없다는 것, 모델 일을 한 적이 없다는 점 등이다. 이런 이유로 부정적인 평가가 많았다는 점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생각을 뒤집어 보기로 했다. 나이가 많으면 그만큼 다른 경험을 통해 쌓아 올린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고, 소속사가 없으니 스스로 만들어 가는 대로 뭐든 할 수 있으며, 모델 일을 하지 않았으니 오히려 가장 신선한 얼굴일 수도 있다고. 사고의 전환은 사람을 절망의 수렁에서 희망으로 건져 올리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였다.

그렇다면 나만의 특별한 무기는 무엇일까. 사실 내게는 슈퍼모델 데뷔도 생전 처음 도전한 경험이었다. 인대가 늘어질 때까지 연습에 연습을 반복하고, 굽이 다 닳아서 한 달에 구두를 두 켤레씩 버렸던 노력과 간절함이 내 무기였다. 그래서 이제는 실행할 때가 되었다. 내가 목표로 하는 것들, 그것을 이루기 위해 쏟아야 하는 노력을 먼저 메모했다. 일과를 마친 후에는 매일 잘한 점, 보완할 점, 해야 할 것 등을 적는 ‘훈련 일지’와 내가 이루고 싶은 것을 100일간 100번 쓰기를 시도했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내가 변해야 할 점을 찾고 행동을 바꾸기 위한 노력도 병행했다.

그 결과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책을 읽고 마음과 행동을 바꾸자, 그간 종이에 평면적으로 적었던 내용이 입체적인 현실로 눈앞에 펼쳐진 것. 2018년 ‘19SS서울 패션위크’를 시작으로 2020년에는 ‘21SS 파리 패션 위크’ 무대까지 설 수 있게 되었다. 감개무량했지만 여기서 도전을 멈추면 안 되었다. 액셀을 더 세게 밟았다. 그랬더니 TV CF부터 브랜드의 패션모델과 광고모델의 러브콜이 쏟아졌다. 책이 불러온 나비효과를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나는 또 다른 행성의 별을 찾고 있다. 그곳에서 새로운 첫발자국을 남기기 위해. 앞으로 배우로서 입지를 다진 후 할리우드에도 진출해 보고 싶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지도상으로는 경계가 분명하다. 하지만 이미 OTT로 무너진 세계라는 한 울타리 안에서 개성적인 캐릭터와 독창적인 스토리만 있다면 얼마든지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시대가 열렸기 때문이다.

지난 일련의 경험들은 이를 위한 1·2차 오디션에 불과했다. 이제 나는 그동안 해온 대로 글과 책을 통해 다양한 분야로 뻗어나갈 것이다. 래퍼 이영지의 말처럼 우리는 아직 ‘작은 나무’일지도 모르니까. 물론 우리는 우리가 어떤 뿌리를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 또 그 뿌리가 얼마나 깊게 자라고 있는지 아직은 잘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누구도 가늠할 수 없는 이 뿌리에 단단함을 입혀 세상이라는 무대의 스포트라이트를 향해 당당히 걸어 나가길! 나와 우리 모두에게 응원의 한마디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