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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심가(丹心歌), 거짓된 무고와 싸운 정몽주의 진정한 절의   2023년 10월

그는 과연 고려를 지키려 이성계와 맞섰을까 

이성계 측근들이 역성혁명 위해 옥사(獄事) 남용하자 성리학적 신념으로 저지

정몽주가 최후를 맞은 장소는 ‘선죽교’ 아닌 포은의 옛집이 있던 ‘태묘동 입구’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 마주 앉아 있는 정몽주와 정도전. 두 사람은 성리학을 받아들여 부패한 고려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신진사대부지만 방법론을 두고 엇갈렸다. / 사진:SBS



고려 말에 이성계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를 초청해 연회를 열었다. 그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포은에게 술을 권하고 시조를 지어 불렀다. “이런들 어떠하리(此亦何如) / 저런들 어떠하리(彼亦何如) / 성황당 뒷담이(城隍堂後垣) / 다 무너진들 어떠하리(頹落亦何如) / 우리도 이같이 하여(我輩若此爲) / 아니 죽으면 또 어떠리(不死亦何如).”


속마음을 떠보고 회유하려는 뜻도 있지만, 죽고 싶지 않으면 굽히라는 협박도 슬며시 얹었다. 포은은 빙긋이 웃고는 술잔을 돌려보내며 응수했다. “이 몸이 죽고 죽어(此身死了死了) / 일백 번 고쳐 죽어(一百番更死了) / 백골이 진토 되어(白骨爲塵土) / 넋이라도 있고 없고(魂魄有也無) /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向主一片丹心) / 가실 줄이 있으랴(寧有改理也歟).”


조선 중기 문신 심광세가 1617년에 지은 [해동악부(海東樂府)]에 정몽주의 ‘단심가(丹心歌)’와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가 실려 있다. 두 노래가 나오는 현존 문헌 가운데 가장 오래됐다. 여기서 ‘하여가’는 ‘단심가’를 끌어내기 위한 노래일 뿐이다. 조선시대에 뜨거운 화두가 됐던 것은 고려왕조와 운명을 함께 한 포은의 충절이었다. 정몽주는 누구이고, 그의 절의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성계와 함께 전장을 누빈 정몽주



 

▎이성계는 고려 말기의 명장이자 조선을 건국한 조선왕조의 창업 군주다. / 사진: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정몽주는 1360년 23세의 나이로 과거에 장원 급제하며 빼어난 학문과 재능을 펼치기 시작했다. 공민왕 때 성균관에서 강론을 펼쳤는데, 이치에 두루 통달해 대사성 이색이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祖)”라고 추켜세웠다. 1374년 성균관 대사성, 1385년 동지공거, 1388년 예문관 대제학 등을 역임하면서 고려 말 신진사대부의 스승으로 자리매김했다.


대학자라고 해서 포은을 샌님으로 본다면 오산이다. 정몽주는 대범하고 유능하며 인간적인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사신으로 나서면 명 태조 주원장과 일본 규슈절도사가 그의 인품, 학식, 논리에 반해 한 수 접어줄 정도였다. 고려 백성들에게는 구세주로 추앙받았다. 포은은 왜구의 노예가 된 고려인들을 안타깝게 여기고 재상들을 설득해 속전(贖錢)을 모았다. 권문세족을 상대로 ‘모금운동’을 펼쳐 한 명이라도 더 구하려고 애썼다. 백성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이 남다른 관리였다. 조정에서도 신망이 두터워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성계 또한 두 살 아래인 정몽주를 흠모해 가까이 두고자 했다. 1364년 동북면 병마사 이성계가 여진족 삼선(三善)·삼개(三介)를 화주(영흥)에서 격퇴할 때 정몽주는 종사관으로 주장(主將)을 보필했다. 1380년 이성계가 삼도 도순찰사가 돼 황산(운봉)의 왜구를 섬멸할 때도 포은은 판도판서로서 보급을 지원했다. 1383년 여진족 호발도가 함주(함흥)를 점령하자 정몽주는 동북면 도지휘사 이성계 휘하의 조전원수(助戰元帥)로 출전해 함께 적을 물리쳤다. 전장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하며 두 사람 사이에 끈끈한 신뢰가 형성됐다.


포은은 권문세족에 맞서 고려를 개혁하고 백성을 구제하려면 이성계의 무력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봤다.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해 우왕과 최영을 몰아냈을 때 같은 편에 선 것도 그래서다. 이성계가 조준, 정도전, 윤소종 등 급진파 사대부들과 손잡고 사전(私田) 혁파에 나섰을 때도 반대하지 않았다. 급진파가 대농장이라는 권문세족의 인적·물적 기반을 무너뜨리고 역성혁명에 필요한 민심을 얻고자 함을 몰랐을 리 없다. 정몽주는 고려를 되살리려는 온건파 사대부들을 대변하면서 실권자 이성계의 균형추가 되고자 했다.


역성혁명 세력은 과감하게 움직였다. 이번에는 고려왕조를 파국으로 몰아넣을 계책을 실행에 옮겼다. 1388년 10월 문하시중 이색과 제자 이숭인이 명나라에 들어가 창왕의 친조(親朝)를 청했는데, 이때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서장관으로 동행했다. 황제는 창왕의 친조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명나라는 이방원을 주목했을 것이다. 고려의 새 실권자가 친아들을 보낸 만큼 특별한 교감이 이뤄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 결과는 다음 해에 나왔다.


“어린 왕(창왕)에게 오지 말라고 전하라. 고려는 왕씨 임금(공민왕)이 시해되어 후사가 끊기는 바람에 다른 성이 왕씨를 가장하고 임금 노릇을 하니 삼한에서 대대로 지켜온 좋은 법이 아니다.”([고려사] 세가 ‘창왕 1년’)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



 

▎4월 6일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 태조 이성계의 무덤인 건원릉에서 봉분을 덮고 있는 억새를 자르는 ‘청완 예초의’가 치러지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1389년 9월 윤승순·권근이 명나라 황제의 성지(聖旨)를 받아왔는데, 기절초풍할 내용이 담겨 있었다.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1376년 신돈의 비첩 반야가 태후궁에 잠입해 우왕의 생모임을 주장한 이래, 저자에는 우왕이 공민왕이 아닌 신돈의 자식이라는 풍문이 나돌았다. 그 저자의 풍문이 명 태조 주원장의 성지로 기정사실이 돼버렸다.


황제로부터 명분을 얻었으니 이제 임금을 갈아치울 차례다. 이성계는 11월에 흥국사에서 회동을 가졌다. 판삼사사 심덕부, 문하찬성사 정몽주와 지용기, 정당문학 설장수, 문하평리 성석린, 지문하부사 조준, 판자혜부사 박위, 밀직부사 정도전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 9인 회동에서 고려의 운명을 바꿀 결의가 나왔다. “마땅히 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워야 한다(廢假立眞). 이에 신종의 7대손 정창군 왕요를 옹립한다.”(<고려사> 세가 ‘공양왕 총서’)


이성계 등은 그 길로 군사를 몰고 정비 안씨(공민왕비)의 궁으로 가서 교서를 받아냈다. 그리하여 고려 제34대 공양왕이 즉위하고 가짜로 몰린 우와 창은 서인으로 강등돼 죽음을 맞는다. 이로써 고려왕조의 정통성은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되고 말았다. 거꾸로 보면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선전하기에 알맞은 조건이 갖춰진 셈이다. 정몽주는 왕을 옹립해 공신의 영예를 누렸지만, 내적인 갈등에 빠졌을 것이다. 고려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지고 있고, 이성계는 본격적으로 창업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포은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정몽주가 이성계에게 등을 돌린 결정적인 계기는 역성혁명 세력이 연거푸 벌인 무리한 옥사(獄事)였다. 이성계의 측근들은 우왕이 죽기 전에 일으킨 도발이나 명나라에서 일어난 실체가 불분명한 고변을 의도적으로 부풀려 고려에 충성하는 대신과 장수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역성혁명의 걸림돌을 제거하려는 정치적 음모였다.


김저의 옥사는 생전에 여흥(여주)에 머물던 우왕이 발단이었다. 1389년 11월 최영의 친족 김저와 정득후가 우왕의 사주를 받고 이성계를 습격했다. 그러나 습격은 실패했고, 김저는 혹독한 국문을 받았다. 옥리들은 공모자를 실토하라면서 대신과 장수들의 이름을 들먹였다. 모진 고문 끝에 김저는 변안열, 우현보, 우홍수, 우인열, 왕안덕 등이 이성계를 죽이고 우왕을 복위시키려고 했다는 공술을 토해냈다.


역성혁명 세력은 그 진술을 공양왕 옹립 직후에 썼다. 공양왕이 이성계를 견제하기 위해 이색을 판문하부사, 변안열을 영삼사사에 임명하자 대간(臺諫)이 들고일어났다. 감찰을 담당하는 사헌부, 간쟁에 종사하는 낭사를 이성계 일파가 장악한 것이다. 김저의 공술에 이름을 올린 변안열은 집중 표적이 되었다. 이성계에 필적하는 무장인 만큼 반드시 제거하려고 했다. 결국 그는 한양으로 유배를 갔다가 1390년 1월 국문을 받지 않고 처형됐다. 고문당하면 또 다른 ‘충신’들이 연루될까 봐 왕이 한양부윤에게 첩지를 내린 것이다.


그러나 이성계의 측근들은 관련자를 고문하고 김저의 공술을 보태 정적들을 죄인 명부에 올렸다. 우왕과 창왕을 옹립한 이색, 창왕의 외조부 이림, 전 시중 우현보는 물론 그 자식들인 이종학, 이귀생, 우홍수까지 ‘신우·신창의 당’이라고 해 국문을 받고 유배길에 올랐다. 이숭인, 권근 등 이색 문하 또한 죄를 뒤집어썼다. 왜구 토벌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장수들인 정지, 왕안덕, 우인열 등도 화를 입었다. 역성혁명 세력은 장차 이성계에게 대항할 가능성이 있는 무장들을 어떻게든 옥사에 엮으려고 했다. 하지만 직접적인 자백이나 증거가 없어 죽이지는 못했다. 그래서일까? 얼마 후 가중처벌할 수 있는 후속 옥사가 터졌다.


1390년 5월 사신 조반이 명나라에서 돌아와 놀라운 소식을 전했다. 파평군 윤이와 중랑장 이초라는 자가 명 태조 주원장에게 고변했는데, 이성계와 공양왕이 모의해 명나라를 치려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윤이와 이초는 지위를 사칭한 정체불명의 인물이었다. 게다가 유배지에 있는 재상들이 은밀히 자신들을 파견해 고변하게 했다면서 그들이 누구인지 털어놓았다. 이성계 일파가 이미 유배 보낸 죄인들과 함께 여러 중신과 장수들의 이름이 윤이의 글에 적혀 있었다. 은밀히 고변한다면서 마치 보란 듯이 면면을 드러낸 것이다.



선 넘은 옥사와 무고를 저지하다



 

▎경기도 기념물 제23호 최영 장군의 묘. / 사진:위키피디아



이성계파 대간들은 다시 들고 일어났다. 윤이의 글에 이름을 올린 자들을 모두 잡아들여 국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양왕이 거부했다. 실체가 불분명하고 저의도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이때 연루자 가운데 김종연이 도망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전해에 박위와 함께 왜구의 본거지 대마도를 정벌한 장수였다. 켕기는 게 있으니 달아났을 것이라며 대간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대대적인 옥사가 일어났다. 중신과 장수 수십 명이 순군옥으로 끌려갔다. 각지에 흩어진 유배 죄인들은 청주옥으로 모았다. 가혹한 국문이 예고됐다.


감옥에서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지고 사람들이 고문으로 죽어 나가자 포은이 나섰다. 1390년 7월 정몽주는 “(공양왕의 선조) 4대를 추봉하는 기회에 이색 등 죄인들을 사면하는 은혜를 내려 주소서”라고 임금에게 건의해 허락을 받았다. 대간이 반발하자 그는 “윤이와 이초의 옥사는 죄가 명백하지 않고 이미 사면을 받았으니 다시 논죄할 수 없다”고 일축했다. 정몽주는 이성계의 측근들이 선을 넘었다고 봤다. 역성혁명의 걸림돌을 제거하고자 죄 없는 사람들을 무고하는 것은 절의를 중시하는 성리학의 이념에 어긋난다고 판단한 것이다.


포은은 신망이 두터운 명신이다. 그가 움직이자 조정에 ‘정몽주당’이 형성돼 역성혁명 세력과 맞섰다. 그러자 이성계 일파는 그해 11월 도망자 김종연의 정변 음모에 연루됐다며 공신 심덕부, 지용기, 박위를 숙청했다. 그들의 군권을 빼앗은 이성계는 1391년 2월 군제를 삼군도총제부로 바꾸고 삼군도총제사(이성계), 좌군총제사(조준), 우군총제사(정도전), 중군총제사(배극렴) 등 수뇌부를 자신과 측근들로 채웠다.


역성혁명 세력이 고려의 군권을 완전히 장악했지만, 포은은 기죽지 않았다. 공양왕의 신임을 얻어 수시중에 오른 정몽주는 조정을 일신하고 대간을 물갈이했다. 정몽주 대간의 화력은 이성계 군부의 창칼에 못지않았다. 포은은 명백한 죄가 없는데도 이성계 일파에 의해 숙청당한 인사들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왕에게 건의해 문서로 경고했다. “지금 이후로 이 사람들의 죄를 다시 논하는 자는 무고(誣告) 죄로 다스릴 것이다.”([고려사] 열전 ‘정몽주’)



신망으로 대세 이뤘으나 이방원에 살해돼



 

▎1906년 촬영된 개성의 선죽교. [고려사]와 [태조실록]에 따르면 이방원의 수하들이 정몽주의 집 근처에서 그를 살해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이후 조선 지배층은 정몽주의 충심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그가 선죽교에서 살해된 것으로 바꿨다. / 사진:Wikimedia Commons(Public Domain)



공양왕은 골치 아픈 문제가 해결됐다며 정몽주에게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내렸다. 사직을 안정시킨 공이 크다는 것이다. 포은은 명나라 법전 [대명률(大明律)]과 원나라 법규집 [지정조격], 그리고 고려의 법령을 참고해 새로운 법률을 만들어 올렸다. 정치적 음모를 꾸며 옥사와 무고를 남발하지 못하도록 법 제도를 정비한 것이다.


정몽주의 공명정대한 처사에 감복해 사대부들이 모여들었다. 세가 순식간에 불어났다. ‘신우·신창의 당’이라고 낙인 찍혔던 구세력도 포은에게 동조해 힘을 실었다. 물론 공양왕도 뒷배가 돼줬다. 포은을 중심으로 고려를 수호하려는 세력이 모두 결집한 것이다. 그리하여 1392년에 접어들면 오히려 정몽주 대세론이 역성혁명 세력을 압도하게 된다.


이성계의 측근들은 대부분 조정에서 쫓겨났다. 조준과 정도전은 탄핵을 받아 귀양길에 올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성계가 3월에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큰 부상을 입고 말았다. 정몽주를 따르던 좌사의 김진양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상소를 올렸다. 유배 중인 조준·정도전 등을 극형에 처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왕의 재가만 얻어낸다면 이성계의 좌우 날개를 꺾을 수 있는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그러나 공양왕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그 틈을 비집고 이방원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 몸을 다친 아버지를 빨리 집으로 모시고, 사람을 보내 측근들의 극형을 막도록 했다. 그리고 위급한 집안을 구하기 위해 포은을 처단하기로 마음먹었다. 1392년 4월 정몽주가 이성계의 병문안을 다녀가자 이방원은 수하들을 포은이 사는 동리로 보냈다. 조영규, 고여, 이부 등이 동리 입구에서 기다리다가 집에 돌아오는 정몽주를 마침내 격살했다. 마지막 버팀목이 쓰러지자 고려는 거짓말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이방원은 조선 건국 후에 왕자의 난을 일으켜 왕권을 거머쥔다. 1405년 태종은 자기가 죽인 정몽주에게 영의정을 추증하고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다. 조선 건국에 공헌한 정도전은 역적으로 전락하고, 고려와 운명을 함께 한 정몽주는 충절의 표상이 되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몽주의 절의파 학통은 조선 전기 사림(士林)으로 이어졌다. 포은의 문묘 종사는 선비들의 숙원이었다. 성인 공자의 사당에 배향하는 것은 유자(儒者)로서 최고의 영예다. 그 숙원은 중종 12년(1517) 조광조와 기묘사림에 의해 이뤄졌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숭모 열기가 더욱 뜨거워졌다. 포은이 절의를 지키다가 죽은 곳으로 선죽교(善竹橋)가 떠오른 것도 이때부터다. 그런데 [고려사]와 [태조실록]을 살펴보면 이방원의 수하들이 포은의 집 근처에서 대기하다가 살해했다고 기록돼 있다. 1485년 개성을 유람한 남효온도 현지 노인의 증언을 빌려 최후의 장소가 포은의 옛집이 있는 태묘동 입구라고 했다([추강집] ‘송경록’). 어째서 선죽교로 바뀌었을까?



‘선죽교’와 ‘단심가’로 만고의 충신 현창



선죽교는 고려의 도읍 개성을 대표하는 다리다. 고려의 운명을 짊어진 신하가 붉은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그 피를 빨아들여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가 자라는, 그래서 정몽주의 최후를 극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무대 장치다. 전란을 겪고 나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해야 했던 조선 지배층은 만고의 충신 정몽주를 현창했고, 그의 충절을 부각하기 위해 선죽교를 이야기 무대로 활용했다. ‘단심가’ 또한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정말로 포은이 부른 노래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극적 효과를 높여주는 주제가에 가깝다.


조선시대에 극적으로 현창된 이야기를 걷어내고 역사적 사실에 초점을 맞추면 또 다른 ‘단심(丹心)’이 돋보인다. 정몽주의 절의는 나라와 임금에 대한 충성심에 국한되지 않는다. 포은이 이성계에게 등을 돌린 계기는 역성혁명 세력이 터무니없는 옥사를 일으키고 무고를 일삼았기 때문이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성리학자였다. 성리학은 인간의 심성과 세상의 이치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무고(誣告)로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는 짓은 심성을 더럽히고 세상을 어지럽히는 악행이므로 용납할 수 없었다. 거짓에 현혹되기 쉬운 오늘날, 우리가 포은의 절의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그는 거짓에 맞서 도리를 지키다가 의로운 최후를 맞았다.




[출처] 월간 중앙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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