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기록 ] 다비드 오이스트라흐 음반 비교: 쇼스타코비치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가단조, Op.77’

글 최낙원

오이스트라흐의 업적은 그 자신의 탁월한 연주뿐만 아니라 20세기 연주 레퍼토리의 엄청난 확장에도 의의가 있다. 그에게 작품을 헌정한 작곡가만 하더라도 이번에 다루는 쇼스타코비치를 위시하여 프로코피예프, 하차투리안, 그리고 그들의 스승인 먀스코프스키 등 소련의 기라성 같은 거장들이며, 또한 그에게 헌정되지는 않았어도 그 덕분에 유명해진 작품들 - 시벨리우스, 글라주노프의 협주곡 등 - 까지 포함하면 그 범위는 더욱 넓어진다. 동시대 미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하이페츠와 메뉴인 역시 여러 작곡가들의 작품을 초연했지만, 주요 레퍼토리로 자리 잡지 못하고 그들 자신만의 연주로 끝난 경우가 많아 오이스트라흐만큼의 공헌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이번에 다루게 될 쇼스타코비치 협주곡은 전 세계 거의 웬만한 콩쿠르나 오디션에서 연주하는 사람이 몇 명씩은 꼭 있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으니 실로 그 파급력이 엄청남을 알 수 있다. 또한 오이스트라흐는 자신에게 헌정된 작품들에 꼼꼼한 보잉과 핑거링 및 갖가지 주석을 정성스럽게 달아 편집하여 출판함으로써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반 세기가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위대한 작품들에 쉽게 접근하도록 세심한 도움을 주고 있으니 이 또한 매우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쇼스타코비치의 협주곡 1번은 워낙 유명하여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간단히 역사를 정리하면 이 곡은 쇼스타코비치 자신의 아픔을 가장 직설적으로 표현한 에세이 같은 곡이라 할 수 있겠다. 독소(獨蘇)전쟁의 지옥과 같은 공포의 세월을 견디고 나니 이번에는 공산당으로부터 가해진 말도 안 되는 박해 때문에 직업도 잃고 정신도 피폐해진 그가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곳은 음악밖에 없었으며, 때문에 밝고 간결한 선전용 음악만을 원했던 스탈린 정권에서 이 곡은 철저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쇼스타코비치가 실제로 이 곡을 완성한 것은 1948년으로 알려져 있으나, 초연 및 출판은 스탈린 사후 2년이 지난 1955년이 되어서야 몇 차례의 수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바이올리니스트의 입장에서 정의를 내린다면 이 곡은 오이스트라흐의 연주 스타일을 바꾼 원흉(?)이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오이스트라흐의 연주는 특유의 따스함과 풍부함, 그리고 그 속에 감춰진 완벽한 기교로 유명한데, 이 곡을 초연한 이후로 그의 연주는 서서히 변하기 시작하여 말년으로 갈수록 다소 차갑고 드라마틱하며 때로는 공포스러울 정도로 섬뜩한 소리까지 자유자재로 내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쇼스타코비치와 함께 인고의 세월을 함께 한 오이스트라흐에게도 이 곡에 나오는 고통의 메아리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1악장의 첫 부분부터 바이올린은 악귀와 원혼이 울부짖는 듯 절규하고 신음하며, 아름다움과 우아함 대신 추함과 혐오스러움, 그리고 죽음의 공포 앞에 떨고 있는 나약한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하여 이전에는 바이올린으로 가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표현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한 마디로 바이올린이라는 악기가 가진 이미지를 완전히 바꿔놓은 곡이라 할 수 있다.

1956(초연 스튜디오 녹음),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예브게니 므라빈스키 지휘 (Melodiya)

(1955년 초연 라이브 녹음은 현재 절판)

1956(초연 스튜디오 녹음)

오이스트라흐는 당대 소련 최고의 지휘자라 불리던 예브게니 므라빈스키와 협업한 적이 많지 않지만 이 곡만큼은 쇼스타코비치와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하나였던 므라빈스키와 자주 연주하였다. 그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버전은 이 초연 레코딩으로서, 따스하고 풍부한 오이스트라흐의 소리와 장엄함 그 자체인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독특한 조화를 흠뻑 느껴볼 수 있다. 다만 지휘자나 독주자, 오케스트라 모두 아직 이 곡에 완전히 익숙해지지 않은 면이 보이며, 다소 과하게 낭만적인 사운드가 많이 나는 것이 결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특히 3악장 파사칼리아). 그러나 테크닉적으로 봤을 때 가장 완벽한 연주임에는 이견이 없으며, 이 곡을 처음 배우는 학생들이 꼭 들으면 좋은 버전이다.

1956,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드미트리 미트로풀로스 지휘 (Columbia)

1956 음반

연도상으로는 위의 녹음보다 앞선 이 버전이 완성될 무렵인 55년도 말, 56년도 초부터 소련의 음악가들에게 해외여행이 허가되며 오이스트라흐의 본격적인 국제 커리어와 더불어 그의 음악적 전성기기 시작되었다. 공교롭게도 1956년은 (EMI 기준으로) 그가 가장 많은 음반을 녹음한 해이며, 그 첫 포문을 쇼스타코비치의 협주곡이 열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의 음악적인 안목이 더욱 넓어졌음을 시사한다. 특히 2악장 스케르초는 이 버전이 단연 최고이다. 기교적으로 완벽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광란에 미쳐 날뛰는 듯한 ‘유대인 음악’을 표현한 트리오 부분 역시 듣는 사람의 털끝을 쭈뼛하게 세울 정도로 적나라하다. 카라얀과 번스타인의 존경을 동시에 한몸에 받았던 그리스 출신의 천재 기인 드미트리 미트로풀로스의 재기 넘치는 지휘는 이 곡을 처음 연주해보는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의 여유와 위트를 가지고 있으며 뉴욕 필 관악 파트의 정확성과 추진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1957,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 예브게니 므라빈스키 지휘 (Praga PR)

1957 음반

본격적으로 이 곡이 가진 드라마틱함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실황 연주이다. 2년 넘게 이 곡을 연구하며 더욱 신랄하고 냉소적인 소리를 내는 법을 익힌 오이스트라흐의 반전 매력이 가감없이 표출되며, 므라빈스키의 믿음직한 지휘 역시 변함이 없다.

1962,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겐나디 로제스트벤스키 지휘

(BBC Classics)

1962 음반

젊은 로제스트벤스키의 야생마같은 지휘와 열광적인 관객 덕분에 한껏 상기된 오이스트라흐의 무시무시한 기교를 여과 없이 느낄 수 있는 버전이다. 전체 레코딩 중 가장 짧은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마지막 악장에서의 속주는 듣는 이를 공포에 질리게 할 정도이다.

1967,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 하인츠 프리케 지휘 (자체 레이블)

1964년과 1967년 두 차례에 걸쳐 오이스트라흐는 심장마비를 겪어 건강이 매우 악화된 상황이어서 사실 이 영상은 오이스트라흐의 다소 병약한 모습을 볼 수 있는 희귀한 자료이다. 그가 여러 차례 함께 연주했던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와 젊은 지휘자 하인츠 프리케의 훌륭한 협업에도 불구하고 기교적으로 많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며, 특히 1,2악장에서는 안 하던 실수까지 몇 차례 등장한다. 그러나 3악장, 카덴차, 4악장에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깊이와 폭발하는 듯한 소리를 들려주어 앞부분의 부족함을 훌륭히 만회한다.

1972, 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 막심 쇼스타코비치 지휘 (EMI)

1972 음반

작곡가의 아들인 막심 쇼스타코비치의 지휘로 함께한 이 버전은 앞의 녹음들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차갑고 냉소적인 사운드로 듣는 이들을 파고든다. 60대 중반의 노년이다 보니 아무래도 힘에 부치는 듯한 모습이 포착되기도 하지만 그의 말년을 함께한 1704년산 마르시크 스트라디바리우스의 포효하는 듯한 소리는 특히 마지막 악장에서 빛을 발한다. 마치 전쟁의 포화 속에서 홀로 살아남은 군인이 잿더미를 뒤집어 쓴 채 자신이 살아있다고 소리치는 듯한 비장함이 느껴지는 카덴차 역시 압권이다.

바이올리니스트 최낙원

예원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예고 재학 중 도미하며 미국 볼티모어 피바디 음대에 진학했다. 이후 지도교수인 빅토르 단첸코의 초청으로 캐나다 왕립음악원 글렌굴드 학교로 옮겨 전문연주자과정과 동대학원 전문예술사과정을 졸업했다.